안녕하세요. 바이럴 뷰 입니다.
오늘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서양 열강은 청과 일본이 문호를 개방한 이후 조선에도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적 접근을 시도하였습니다.
조선 앞바다의 이항선이 빈번히 출몰하여 해안을 측량하고 주변을 탐색하며 통상 수교를 요구하자 조선정부와
백성은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나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청해 베이징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여 두만강 하류를 넘나들자 서양 침략에 대한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한편 조선은 내부적으로도 세도정치로 인한 부정부패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하여 백성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습니다.
안으로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혼란과 밖으로 외세의 통상 요구가 거세지고 있던 시기에 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고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를 계기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과감한 개혁 정치를 실시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정치기간을 바로잡기 위하여 세도정치를 펴던 안동 김씨 일족을 축출하고 당파나 신분의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나아가 세도정치의 핵심 권력기구이던 비변사를 축소 격화시키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시켜 행정권은 의정부에서 군사권은 3군부에서 각각 나누어 맞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이항선 출몰로 야기된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수군을 강화하고 훈련도감의 군사력을 증강시켰습니다. 아울러 대전 회통 육전조례 등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체제를 재정비였고,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관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강제로 거두고 상평통보에 100배가치에 해당하는 고액화폐인 당백전을 발행하여 경제적 혼란을 야기시켰습니다
또한 공사의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고 양반의 묘지임에서 나무를 베어 목재로 사용하였습니다. 경복궁은 공사 시작 8년 만에 완공되었지만 무리한 중건으로 인해 양반과 백성 모두에게 원성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경복궁 중건을 시작할 때 재정이 메말라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팔도의 부자 명단을 뽑아서 돈을 거두어들였다.
백성들은 입을 비쭉거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원납 전이 아니라 원납전이다 이때 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하였다 도성에서는 문세를 받았다 이와 같이 매천여록의 기록된 내용을 통해 경복궁 중건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농민봉기의 주요 원인이었던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아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재정을 확보하여 왕권 강화를 꿰하였습니다. 전종 논란의 해결을 위해 양전 사업을 시행하여 토지대장에서 누락된 땅을 찾아내었고, 여기에 세금을 징수하여 재정 수입을 늘렸습니다.
또한 군정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평민에게만 부과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평민에게만 집중되었던 조세 부담을 공평하게 하였습니다.그리고 삼정중 가장 폐단위 심각했던 환곡을 개선하기 위해 곡물 대여 기관인 사창을 지역주민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도록 하는 사창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사창제 실시로 지방간의 횡포가 줄고 농민의 부담이 감소하였으며 국가재정 확충에도 보탬이 되었습니다.나아가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전국 600여개의 서원 중 47개 수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습니다.
당시 서원은 붕당의 근거지이자 지방 양반들의 세력 기반으로 면세와 면역의 혜택을 누렸으며 지역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등 각종 폐단을 일으켰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각종 개혁 정책은 통치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기간을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하지만이는 근대 사회를 지향한 개혁이 아닌 왕권 강화와 정권 유지를 위한 개혁이었다는 평을 받고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